바둑은 내게 단순한 취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삶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돌을 놓는 그 짧은 순간마다 생각이 스며들고, 선택이 쌓이며, 어느새 한 판의 흐름이 완성된다. 그 과정은 어쩐지 내가 살아온 시간들과도 닮아 있었다.
처음 바둑을 접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명절이면 고향을 찾던 숙부님들은 으레 바둑판을 펼쳤고,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수담을 이어갔다. 어린 나는 그 곁에 앉아 조용히 지켜보곤 했다. 특별히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돌의 흐름과 자리의 의미를 어깨너머로 익혀갔다. 바둑은 그렇게 설명이 아닌 경험으로 다가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이미 나는 바둑이라는 세계의 문턱에 서 있었던 셈이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숙부님께 바둑을 두자고 청했다. 실력 차이가 컸던 탓인지 선뜻 응해 주시지 않았지만, 몇 번이고 졸라 결국 한 판을 둘 수 있었다. 다섯 점을 깔고 시작한 접바둑이었다. 초반에는 내가 꽤 유리하게 흘러갔다. 형세를 읽는 능력은 부족했지만, 놓인 돌의 수가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감이 생겼다. 이대로라면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바둑은 그런 단순한 기대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종반에 이르러 숙부님의 수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던 수들이 하나둘 이어지더니, 어느 순간 판 전체의 흐름이 뒤집혔다. 나는 그저 눈앞의 집에만 집착하고 있었지만, 숙부님은 전체를 보고 있었다. 결국 다 이겼다고 생각했던 바둑을 지고 말았다. 그때 느낀 허탈함과 분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바둑이 얼마나 깊은 세계인지 처음으로 실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바둑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졌다. 형편상 책을 사기는 어려웠지만, 형들과 동네 선배들에게서 바둑책을 빌려 읽었다. 정석을 익히고, 반복해서 복기하며 기초를 다졌다. 수학 공식을 외우듯, 영어 문법을 익히듯 바둑의 기본을 몸에 익히려 애썼다. 그러나 다시 마주한 실전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정석대로 흘러가리라 믿었던 국면에서 숙부님은 늘 변칙을 구사했다. 내가 배운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마다 혼란스러웠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정석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바둑은 정답을 외운다고 해서 풀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변하고,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살아 있는 세계였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바둑은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쉽게 떼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학 시절,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강의는 자주 중단되었고, 캠퍼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의 혼란 속에서 마음을 둘 곳을 찾기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둑판 앞에 앉았다. 돌을 하나씩 놓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들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바둑은 내게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마음을 정리하는 도구가 되었고,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바둑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에는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지만, 어느 순간부터 좋은 수를 찾는 것이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승패는 결과일 뿐이고, 그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수를 두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 그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순간들이 바둑의 진짜 가치였다.
바둑은 또한 사람을 이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 두던 바둑, 동아리에서 만난 기우들과의 대국, 그리고 새로운 인연들까지. 바둑판 앞에서는 나이도, 직업도, 배경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한 수 한 수에 집중하는 대국자로서 서로를 마주할 뿐이었다. 그 속에서 만들어진 관계는 꾸밈이 없었고, 오래도록 이어졌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여전히 바둑을 둔다. 예전처럼 승부에 집착하지는 않지만, 한 수를 놓을 때의 긴장감과 즐거움은 여전하다. 오히려 지금은 그 과정 자체를 더 깊이 음미하게 된다. 때로는 한 판의 바둑을 통해 하루를 돌아보고, 때로는 삶의 방향을 생각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바둑은 늘 내 곁에 있었다. 기쁠 때도, 힘들 때도, 방향을 잃었을 때도 나는 바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나를 발견하곤 했다. 바둑은 나에게 기술이 아니라 태도였고,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으며, 경쟁이 아니라 성찰이었다.
바둑은 인생과 닮아 있다. 한 수를 놓는 순간 우리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되돌릴 수 없고, 다음 수에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과감히 버려야 하고, 때로는 끝까지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다. 평정심을 잃는 순간, 아무리 좋은 형세도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바둑을 오래 두었다는 것은 단순히 기술이 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단단해졌다는 뜻이 아닐까. 수많은 판을 두며 얻은 작은 깨달음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언젠가 삶의 끝에 다다르게 된다면, 나는 바둑판과 바둑돌을 곁에 두고 싶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 수를 고민하듯, 그렇게 조용히 나의 시간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 바둑은 그렇게 내 삶의 처음과 끝을 함께하는, 가장 오래된 친구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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