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바둑판 위에 하나의 격언이 떠오른다.
“두점머리는 죽어도 두들겨라.”
이 짧은 문장은 한 시대를 지배했던 일본 바둑의 정신을 압축한다.
돌의 능률, 그리고 형태의 아름다움.
그것이 곧 승부의 본질이라 믿었던 시대였다.
논리적으로 보면 모순이다.
이미 죽어가는 상황에서 상대의 두점머리를 때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이 격언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주입이었다.
두점머리는 반드시 공격해야 할 급소이며, 그것을 허용하는 것은 실수라는 인식.
그 반복된 각인은, 바둑을 넘어 하나의 미학으로 자리 잡았다.
두점머리를 때리는 순간, 상대는 미숙한 하수로 보인다.
때리는 쪽은, 어딘가 모르게 우월감과 함께 연민까지 느끼게 된다.
그것이 일본 바둑이 만들어낸 감정의 구조였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인공지능이 등장한 이후, 바둑판 위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AI는 두점머리를 거리낌 없이 내주고, 심지어 스스로 맞기도 한다.
한때 절대적 금기였던 형태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인간 고수들은 처음 그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수백 년간 쌓아온 미학이, 한순간에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일본 바둑의 황금기.
그 중심에는 한 인물이 있었다.
오타케 히데오.
기타니 도장의 수석사범이었던 그는
다케미야 마사키, 조치훈 같은
수많은 정상급 기사들을 길러냈다.
그의 바둑 철학은 단순했다.
“바둑을 질지언정 추한 수는 두지 않는다.”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일본 미학의 화신이자, 그 전도사였다.
한편, 바다 건너에서는 전혀 다른 흐름이 자라고 있었다.
‘한국류’라 불린 새로운 스타일.
처음 이 말은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그 의미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다.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며, 실전 위주의 투박한 바둑.
그러나 그 거칠음 속에는 생존 본능이 있었다.
몸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에게 밀착하며,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
그리고 1993년.
역사의 한 장면이 펼쳐진다.
응씨배 결승 1993.
대결의 주인공은
일본 미학의 상징, 오타케 히데오.
그리고 한국류의 화신, 서봉수.
두 사람의 승부는 팽팽하게 이어져 최종 5국까지 향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대국.
초반부터 흐름은 일방적이었다.
오타케의 정교한 수법에 말려든 서봉수는
이미 회생 불가능해 보이는 절망적인 국면에 빠진다.
하지만 그 순간, 전혀 다른 바둑이 시작된다.
이것은 계산의 바둑이 아니었다.
형태의 바둑도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의 바둑이었다.
마치 링 위에서 몰린 복서가 마지막 힘을 짜내듯,
서봉수는 모든 것을 던지며 싸운다.
그 모습은
홍수환이
위기 속에서 두 팔을 휘두르며 기적을 만들어내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결과는, 대역전.
이 한 판은 단순한 승부가 아니었다.
시대의 전환점이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국화 같은 일본 바둑이 물러나고,
거칠지만 강인한 야생화 같은 한국 바둑이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
바둑은 전쟁과 닮아 있다.
돌 하나하나가 병사라면, 그 효율은 곧 승패로 이어진다.
일본은 이미 오래전, 이 ‘능률’이라는 개념으로 바둑을 완성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능률은 곧 아름다움이 되었고
아름다움은 규칙이 되었으며
규칙은 결국 족쇄가 되었다.
두점머리, 빈삼각.
수많은 금기들이 쌓여갔다.
전쟁에서 금기가 많아질수록, 선택지는 줄어든다.
그리고 선택지가 줄어든 전쟁은, 패배로 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바둑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그 미학이
결국 그들을 멈춰 세운 원인이 되었다.
물론 일본 바둑에는 분명한 매력이 있었다.
중앙을 넓게 펼치는
우주류 같은 스타일은
낭만적이었고, 이해하기도 쉬웠다.
그러나 승부는 낭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AI의 바둑을 다시 바라본다.
돌은 서로 밀착되고, 옆구리는 끊임없이 파고든다.
그 안에는 한국류의 흔적이 분명히 남아 있다.
결국, 승부의 본질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생존이었음을
AI는 다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바둑은 또 한 번 변하고 있다.
한때 하찮게 여겨졌던 ‘삼삼’이
이제는 최정상 기사들이 가장 먼저 선택하는 수가 되었다.
어제의 상식이 오늘의 오류가 되고,
어제의 금기가 오늘의 정석이 된다.
바둑에는 정답이 없다.
다만, 시대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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