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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바둑계의 거성 후지사와 이야기

작성자: choochoo carain 등록일: 2026-04-17 16:34 | 조회수: 16
일본 바둑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오청원이라면, 가장 사랑받는 인기 기사로는 단연 후지사와 슈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83년 조치훈 9단에게 타이틀을 빼앗기기 전까지 일본 최대의 바둑 타이틀인 ‘기성’을 제1기부터 6년 연속 제패하며 기타니 문하의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제치고,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일본 바둑계의 제1인자로 군림했다. 그가 6연패를 달성했을 당시 나이는 이미 57세였다. 후지사와 슈코의 바둑은 힘과 두터움, 그리고 용맹함에서 마치 호랑이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그의 바둑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날카로운 안광과 인상 역시 호랑이 같았고, 뛰어난 술 실력과 도박에 대한 집착 또한 그의 기질을 보여주는 요소였다. 이러한 끝없는 기행과 호언장담은 오히려 많은 팬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단순한 인기 기사를 넘어, 한국 바둑팬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조훈현 9단의 스승이라는 점이 그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다만 조훈현은 원래 세고에 겐사쿠 9단의 문하생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도 사연이 있었다. 처음에는 기타니 9단 문하로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소년 조훈현의 재능을 눈여겨본 세고에 9단이 “저 아이는 내가 직접 키우고 싶다”고 나서면서 계획이 바뀌었다. 당시 어린 조훈현은 기타니 도장을 더 익숙하게 느꼈기에 다소 아쉬움을 가졌다고 한다. 그곳에는 이미 조남철, 김인, 하찬석 등이 수련하고 있었고 또래 친구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훈현은 세고에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기타니 도장의 젊은 기사들과도 자주 어울리며 바둑 수련을 이어갔다. 특히 그는 자연스럽게 후지사와 슈코가 이끄는 ‘후지사와 스쿨’에서도 바둑을 두게 되었다. 후지사와는 정식 제자를 두지는 않았지만, 본래 보스 기질과 친화력으로 젊은 기사들을 곁에 두고 함께 바둑을 두는 것을 즐겼다. 그중에서도 그는 조훈현의 재능을 각별히 아꼈으며, 하루에도 여러 판씩 직접 대국과 지도를 이어갔다. 1977년 이른 봄, 후지사와는 돌연 한국을 찾았다. 특별한 일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훈현이가 보고 싶어서”라는 이유 하나였다. 그는 술 한 병만 들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조훈현이 귀국한 지 5년 만의 재회였다. 후지사와는 관광도 하지 않고 호텔에 머물며 3박 4일 내내 조훈현과 복기와 술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시기는 그가 제1기 ‘기성’ 타이틀을 차지한 직후였다. 그는 늘 “조훈현의 기재는 세계 최고”라고 말하곤 했다. 일본의 양대 신문사인 아사히신문과 요미우리신문의 주도권 경쟁 속에서 탄생한 ‘기성전’은 결과적으로 후지사와를 위한 무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시 일본 바둑계의 양대 타이틀은 ‘명인전’과 ‘본인방전’이었고, 여기에 아사히신문이 새롭게 뛰어들면서 판도가 흔들렸다. 신문사 간 경쟁은 소송으로까지 번졌고, 그 결과 아사히가 명인전 주최권을 확보하며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에 자극받은 요미우리는 대규모 신설 기전인 ‘기성전’을 출범시켰다. 대회 방식 또한 기존 토너먼트와 달리, 전단쟁패전과 도전자 결정전, 그리고 7번기로 이어지는 독창적인 구조였다. 후지사와는 이 새로운 기전의 탄생에 누구보다 크게 고무되었다. 당시 그는 경륜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있었고, 빚에 시달리며 술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최고기사, 최고상금’이라는 기성전의 슬로건은 그에게 다시 불을 지폈다. 제1기 기성전에서 그는 기적처럼 결승에 올랐고, 하시모토 우타로 9단을 상대로 4승 1패로 승리하며 초대 기성에 등극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아무도 그가 이후 6년 연속 타이틀을 지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나는 1년에 네 판만 이기면 된다”고 말하곤 했다. 7번기에서 4승만 거두면 방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다른 대회를 모두 잃더라도 기성만 지키면 일본 바둑계 최정상이라는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제2기 도전자로 등장한 가토 마사오 9단과의 대결에서는 1승 2패로 몰렸지만, 이후 3연승을 거두며 대역전극을 펼쳤다. 이후 등장한 이시다 9단, 임해봉 9단, 오다케 9단 등 당대 최강자들을 상대로도 그는 기세와 경험으로 타이틀을 지켜냈다. 그리고 1983년, 제7기 기성전 도전자로 조치훈 9단이 등장했다. 당시 조치훈은 이미 일본 바둑계 주요 타이틀을 석권하며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대부분은 그의 우세를 점쳤고, 일부는 99% 승리를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야제에서 후지사와는 “사랑하는 조군에게 네 판 정도는 가르쳐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여유를 보였다. 조치훈 역시 “존경하는 스승이니 몇 판은 배우겠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막상 대국이 시작되자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후지사와는 초반 3연승을 거두며 조치훈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일본 열도는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조치훈은 본래의 실리 중심 스타일로 돌아오며 반격에 성공했고, 결국 4연승으로 타이틀을 뒤집는 대역전극을 완성했다. 이 패배 이후 후지사와의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8년 뒤인 1991년, 다시 ‘왕좌’를 차지하며 유령처럼 복귀했다. 이후에도 그는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1984년 한·일 교류전에서는 한국기원에서 검토를 주도했고, 1988년 응씨배에서는 중국 섭위평 9단과의 대국에 참가했다. 당시 그는 이미 두 차례 암 수술을 받은 상태였고 손과 머리가 떨리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세계 최강급 기사인 섭위평을 상대로 끝까지 치열하게 맞섰고, 결국 반집패로 물러났다. 서울에 모인 세계 바둑계 관계자들은 늙은 호랑이의 마지막 기백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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